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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형아틸라(Attila) 왕은 434년부터 453년까지 훈족을 통치하던 왕입니다. 당시 훈족의 왕은 오스트로고트족, 알란족, 불가르족 등으로 구성된 동유럽 제국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훈족의 아틸라왕 개요
루길라의 조카인 아틸라와 그의 형 블레다는 435년 루길라의 뒤를 이어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사실 이들 둘이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기보다는 형인 블레다가 왕으로 불리었지만, 동생이었던 아틸라가 강력한 2인자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형 블레다는 445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아틸라의 이름이 더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통치 기간에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가장 두려운 적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다뉴브 강을 두 번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했습니다. 441년에는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고, 451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올를레앙까지 진군하여 지금의 프랑스 땅까지 정복을 시도하였지만 카탈라우니아(Catalaunian) 평원 전투에서 패배하며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북부 지방은 점령하였으나, 로마까지 내려가지 못하였습니다. 아틸라는 로마를 점려하기 위하여 작전을 계획하던 중 453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아틸라가 죽은 후 훈족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게르만족의 반란으로 인해 훈족은 빠르게 붕괴하였습니다.
훈족의 아틸라왕 일생
아틸라는 유럽이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훈족은 비교적 뒤늦게 유럽에 도착한 유목민들 이었으며 370년대에 볼가 강을 건너 알란족을 흡수하고, 다뉴브강 사이의 고트족을 공격하였습니다. 유목민 출신으로 기동력이 매우 뛰어난 민족이었으며 게르만족을 로마 쪽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훈족은 인종적으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게 되었으며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일부는 자신들의 정체정을 유지한체 훈족의 통치권을 인정하면서 국적에 동화되었습니다. 훈족이 게르만 민족을 로마로 밀어내는 한편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군사적 승리를 많이 거둘 수 있었습니다.
445년 형 블레다가 죽게되면서 아틸라가 훈족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블레다의 죽음에는 많은 의혹들이 있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아틸라가 왕위에 오르면서 로마와 그리스 지역 출신의 유능한 지식인들을 최측근으로 두어 관료를 꾸렸습니다.
훈족의 아틸라왕 전쟁사
아버지인 루길라의 죽은 시점 훈족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와 훈족 귀족의 귀환을 위한 협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로마에 로마인 포로당 몸값을 지불받고 돌아와 헝가리 평원에 있는 자신들의 제국을 공고히 하는데 노력했습니다.
훈족은 이후 몇 년동안 사산 제국을 침공하며 로마의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에서 패배를 경험한 후 다시 유럽 정복에 나섰습니다. 훈족은 435년 조약을 깨고 440년 로마 국경을 넘어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로마가 아프리카 반달족에 대항하기 위해 발칸반도에서 시칠리아로 병력을 뺀 441년에 아틸라와 블레다는 발칸 반도를 공격하였습니다. 나사바 강을 따라 진군한 훈족은 콘스탄티노플 외곽까지 진군하며 로마 군대를 격파해 나갔습니다. 저항을 할 수 없었던 테오도시우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훈족의 요구에 대부분을 수용하여 훈족은 자신들의 제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블레다는 동로마에서 훈족이 철수한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블레다의 사망 이후 450년에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 또한 낙마로 급사하게 되며, 다시 훈족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틸라는 굳건한 동로마제국보다 이미 세력이 약해진 서로마제국의 침략에 눈을 돌린 상태였습니다.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동로마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입지가 궁지에 몰리자 아틸라에게 청혼 하였습니다. 아틸라는 호노리아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서로마 제국의 영토 절반을 지참금으로 받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서로마 황제는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훈족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451년 서로마 원정에서는 아틸라가 큰 참패를 하여 돌아갔지만, 452년 다시 북부 이탈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아틸라 군대는 많은 도시를 공격하여 항복을 이끌어 냈고 로마로 진군하였습니다. 당시 교황인 성 레오 1세는 직접 아틸라를 만나 아틸라와 이야기를 한뒤, 아틸라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로 인해 레오 1세는 사후에 로마의 성인으로 추대받았습니다.
453년 봄 아틸라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훈족은 급격하게 위태로워집니다. 아틸라의 장남인 엘라크가 왕이 되려하였으나 동생들의 세력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아틸라와 동맹을 맺었던 게피다이의 왕 아르다리크가 동로마와 계약을 맺고 전쟁을 일으켜 해당 전투에서 엘라크가 전사하며 훈족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훈족의 아틸라왕 평가
기록에 남아있는 아틸라의 성품은 관대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는 기록과 잔혹하고 교활한 성품을 기록이 있습니다.
아틸라는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베풀고, 본인의 옷차림 또한 검소하며, 보석과 귀금속과 같은 사치스러움과는 멀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아틸라는 유럽에서 ‘공포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훈족의 자손으로 불리는 몽골 제국도 동유럽 침공 시 비슷한 악명을 듣게 됩니다. 이러한 훈족에 대한 두려움과 악명은 유럽의 여러 전설에 남아있습니다.
아틸라는 중세 유럽 역사에서 독특한 지도자로 평가되며, 그의 영향력은 현대에도 지속됩니다. 그는 훈족 제국을 건설하고 로마 제국과의 강력한 대립을 통해 유럽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아틸라의 무서운 군사적 능력과 전략은 그를 '천벌의 주인'으로 불리게 만들었으며, 그의 이름은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아틸라는 단순히 약탈과 파괴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전략을 시행했습니다. 그의 영향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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