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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형잔 다르크,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 시대의 군인으로 구국 영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수호성인 중 한 명이자, 걸스카우트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지만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끝내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잔 다르크의 생애와 배경
잔 다르크는 1412년 1월 6일 생으로 추정되며 실제 생일 보다는 축일 또는 신성함을 더 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일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해당 일자를 공식 탄생일로 보고 기념식을 하고 있습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메우스 계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평민 출신입니다. 3명의 형제와 1명의 자매가 있었으며, 그녀의 가족은 약 20헥타르의 땅을 가진 농민이자 마을 관리자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1337년에 시작된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중에 태어났습니다. 거의 모든 전투가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어, 프랑스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6세는 잦은 정신질환으로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오를레앙 공의 동생 루이와 부르고뉴 공의 사촌 존이 프랑스의 섭정을 놓고 다투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1407년 부르고뉴 공은 오를레앙 공의 암살을 명령하고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영국의 헨리 5세는 1415년에 프랑스의 내부 분열을 틈타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잔 다르크가 사는 마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425년에 공격을 받자 잔 다르크는 영국인들이 프랑스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샤를 7세는 1429년 잔 다르크의 나이 17세였을 때 역사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프랑스에는 처녀성을 가진 여성이 나타나 전쟁을 마무리하고 프랑스를 구할 것이라는 신화적 믿음이 있었고, 잔 다르크가 바로 그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잔 다르크의 전쟁 공적
잔 다르크는 1429년 오를레앙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오를레앙은 영국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고, 지휘관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잔 다르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전투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잔 다르크가 오기 전 전투는 모두 패배하고 있었지만, 잔 다르크의 주장으로 생 아구스탱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담한 주장과 전쟁 방식으로 프랑스군이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하게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가장 큰 공적은 랭스 전투에 있습니다. 프랑스 군은 파리보다 두배 멀리 떨어져 있는 랭스로 진격하였고, 가는 길에 있는 3개의 도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녀를 믿지 못하던 지휘관들도 모두 그녀를 지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 7월 부르고뉴파가 장악하던 오세르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랭스는 결국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게 됩니다.
샤를 7세의 대관식이 이 랭스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며 5년간 공석으로 남아있던 프랑스 국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도 참석한 이 대관식으로 샤를 7세는 프랑스 국왕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잔다르크는 10월 왕의 회군 명령을 받기 전까지 평화로운 방식으로 파리 인근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잔 다르크의 종교 재판과 유명한 어록
이듬해인 1430년 5월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영국 연합군과 격전 끝에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잔 다르크는 이단으로 재판을 받을 당시
“그러나 스스로 굴복하고 믿음 없이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다. 젊어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영국이 잔 다르크를 이단재판에 세운 이유는 샤를 7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녀의 명성이 샤를 7세보다 더 커지면서 샤를 7세 또한 잔 다르크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코숑 주교는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하였고, 당시에는 남장이나 여장하는 것은 동성애로 취급하여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로 취급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과거 재판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한 무죄 판결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순결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재판 결과는 프랑스 국민의 애국심을 부추기게 하였고, 샤를 7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정통성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사망하고 22년이 흐른 뒤 무능한 영국의 헨리 6세로 인해 두 나라 간의 백년전쟁은 종료가 되었습니다.
잔 다르크의 평가
잔 다르크는 사후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이야기 됩니다. 시골 출신의 그녀가 프랑스를 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은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자, 애국심을 불태우기 위한 방법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내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 초 잔 다르크의 성인으로 시성하고자 하는 국가적인 지원이 시작되어 교황 비오 10세(1910년)에 의해 시복 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댁토 15세에 의해 성인이 되었습니다.
20세기말까지 잔 다르크는 정치색이 없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 받았으나, 최근에는 잔 다르크의 동상 앞에서 유세하는 등의 극우파들의 잦은 이용으로 인해 극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잔 다르크는 여전히 프랑스의 수호 성인으로 칭송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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