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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형로마 제국 초대 황제이자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였지만, 카이사르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카이사르 집안의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3년에는 군사 정권인 제2차 삼두 정치를 열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00년에 걸친 내정을 종식 시키고,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였으며, 도시를 건설하고, 학문과 예술을 발전시켜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세워진 로마제국은 약 1500년간 지속되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생애
아우구스투스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로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아들이었으며, 로마 근교에 위치한 벨리트라이라는 마을에서 자라났다. 아버지의 집안은 대대로 기사 가문으로 군단의 사령관을 맡은 증조할아버지나 공공기관에 재직한 할아버지, 마케도니아의 총독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평민 중에는 유복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4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시리아의 총독과 재혼하였다.
이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발탁이 되어 정식으로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하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얻기 위해 로마로 향하는데,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자금을 모아 기원전 44년 5월 카이사르의 이름을 걸고 로마에 도착하였다.
기원전 43년에 군사 독재 체제인 제 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3명의 집정관이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물리치기 위함이라는 명분에 의해 평민들에게 크게 지지를 받았다. 기원전 42년 로마의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옥타미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임을 강조하였다. 이후 삼두정치의 집정관들은 새로운 영토 협정을 맺으며,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리하기로 하였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동쪽의 이집트로 여행을 갔다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룬시디움 조약을 하며 옥타비아누스는 서쪽 지방을, 안토니우스는 동쪽 지방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맡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조약도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전 32년 말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박탈하고 이집트에 선전 포고를 하게 된다. 기원전 31년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해상 보급 경로를 차단하게 되고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 일어나게 된다.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등극
기원전 29년 로마 원로원은 이미 로마 최고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제1 시민이라는 칭호를 주게 된다. 기원전 27년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되며 그의 군사력과 부는 로마 전역에서 가장 큰 상황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는 속주들은 갈리아, 시리아, 키프로스, 이집트, 히스파니아, 킬리키아 등이 있었고 당시 권한으로는 각 속주와 군단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어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군주정을 좋아하지 않았던 당시 로마 시민들의 시대상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황제의 칭호를 받지는 않았지만, 공직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귀족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아 거부권 행사, 발언권, 선거 관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절대 지휘권을 부여받아 로마군의 최고 통수권자 자격을 얻게 되었다. 레피두스가 죽은 후 기원전 12년에는 그가 자리하고 있던 최고 제사장 자리에도 오른다. 이로써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서 갖을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
전투와 확장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을 확장하기 위해 군사적인 전투를 펼쳤습니다. 그는 제국의 국경을 넓혀 지중해 지역과 유럽의 다양한 영토들을 정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로마 제국을 더욱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의 주요 전투로는 악티움 전투(Actium Battle)가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에질레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로마 제국의 주요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팍스 로마나"의 구축
아우구구스투스는 평화를 유지하고 로마 제국의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파크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를 구축했습니다. 이는 로마 제국 내부의 안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민중들에게 안전과 안정을 제공하고, 상업과 경제의 번창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는 전반적으로 전쟁이 적은 시기였으며, 이는 제국의 안정성과 번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제도의 개편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제도와 행정을 개편하여 원활한 통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앙집중화와 행정체계를 향상시켜 제국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이를 통해 로마 제국의 다양한 영토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안정을 확보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 제국 내의 법률 체계를 개선하여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문화적 발전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시기는 로마 문화의 확산과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다양한 문화적 프로젝트를 후원하여 로마의 건축,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그의 통치 시기에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고, 로마 문화가 번창했습니다.자신의 권력 수립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정식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그는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의 상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로마 제국의 정식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그 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평가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로서 그의 생애는 로마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촉진하였으며, 그의 행적은 오랜 세월 동안 로마 제국의 모범적인 통치자로 기억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전투와 확장을 통해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팍스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의 평화를 구축하여 안정성을 확보했습니다.
또한, 그는 제도의 개편을 통해 로마 제국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문화적 발전을 촉진하여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 내부의 안정과 번영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그의 권력 수립은 로마 제국의 정식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그의 행적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생애를 통해 로마 제국을 위대하고 번영하는 제국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으며, 로마 문화와 제도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후세에도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며, 그가 세운 토대 위에 지어진 로마 제국은 수세기에 걸쳐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생애는 로마 역사상 한 장의 중요한 페이지로 기록되며,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금기시대를 빛나는 시대로 만들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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